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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시 다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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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니시 다키지로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해군 항공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를 창설하고 지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진주만 공격에 반대했으나, 이후 필리핀 공략전에서 제11항공함대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항공 주병론과 전함 무용론을 주장하며 일본 해군의 전술 변화를 이끌었으며,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충칭 폭격 등을 지휘했다. 마리아나 해전 이후 가미카제 특공대 창설을 주도하여, 패색이 짙어진 전쟁 상황에서 자살 공격을 통해 전황을 타개하려 했다. 종전 후에는 자결했으며, 그의 특공 전술은 전후 일본 사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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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시 다키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니시 다키지로 해군 중장 (1939–1943)
오니시 다키지로 해군 중장 (1939–1943)
출생일1891년 6월 2일
출생지일본 효고현히카미 군아시다 촌(현재의 단바 시아오가키 쵸)
사망일1945년 8월 16일 (54세)
사망지일본 도쿄
묘소니시아시다 공동묘지, 소지사(츠루미 소지사)
별명특공의 아버지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912년 – 1945년
최종 계급해군 중장
주요 지휘사세보 해군 항공대
제2 연합 항공대
제1 연합 항공대
제1 항공 함대
해군 군령부 차장
주요 참전중일 전쟁
중칭 폭격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레이테 만 해전

2. 초기 생애 및 경력

오니시 다키지로는 1891년 효고현 출신으로, 1912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했다. 소위 임관 후 여러 함정에서 근무하다 중위 시절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에 배속되어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 초창기 발전에 기여했다.[13][14]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되어 전투기 개발 및 사용에 대해 연구했다. 귀국 후 대위로 진급,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 등에서 근무했다.

소령 진급 후 1928년 항공모함 호쇼 항공대 사령관, 1932년 항공모함 가가 부장을 역임했다.[23] 1939년 소장으로 진급, 제11항공함대 참모장이 되었다.

오니시는 나카지마 비행기 설립자 나카지마 지쿠헤이의 영향을 받아 항공 주병론과 전함 무용론을 주장했다.[14] 1935년 야마토무사시 건조에 반대하며 항공모함 건조를 주장했고,[26] 전투기 무용론과 폭격기 중심의 항공 전략을 주장했다.[28][32]

1924년 해군대학교 갑종 시험에 응시했으나, 요정에서의 게이샤와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17][18] 1928년에는 맞선을 통해 결혼했다.[20]

2. 1. 효고현 출생과 해군병학교 시절

오니시는 1891년 6월 2일 효고현 히카미군 아시다 촌(현 단바시 아오가키 정)에서 소지주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1] 구제 카시와바라 중학교 재학 시절 일본해 해전 승전 소식을 접하고, 선배에게 들은 히로세 다케오 중좌를 존경하게 되었다. 1909년 해군병학교 40기에 20등으로 입학했다.[11] 병학교에서는 봉 쓰러뜨리기 경기에서 동기 야마구치 다몬과 함께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12] 검도유도 실력도 뛰어났으며,[12] 기숙사 사감을 맡아 규율을 어기는 학생을 엄하게 다루기도 해 '싸움꾼 다키베'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2] 1912년 150명 중 20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13]

해군병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순양함 소야,[13] 순양전함 쓰쿠바,[13] 전함 가와치에 차례로 승선했다.[13] 1914년 12월부터 해군 포술 학교와 해군 수뢰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13] 1915년 12월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에 승선했다.[13]

1915년 12월, 야마구치 사부로 등과 함께 항공술 연구원으로 선발되어 비행 조종술을 배웠다.[14] 1916년 4월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에 배속되었다.[14] 같은 해, 나카지마 비행기 설립을 추진하던 나카지마 지쿠헤이를 도와 출자자를 물색했으나, 군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뻔했다.[14] 오니시는 군에서 제대하고 나카지마의 회사에 합류하려 했으나, 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4] 나카지마는 대함 거포주의를 버리고 항공 군비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오니시는 이 영향을 받아 항공 주병론을 주장하게 되었다.[14]

1918년 요코스카 진수부 소속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왔다.[15] 귀국 후 1921년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에 배속되어 셈필 교육단의 강습에 참가했고, 일본 최초로 낙하산 강하를 실시했다.[15] 이후 해군 포술 학교, 해군 수뢰 학교 교관, 가스미가우라 해군 항공대 교관, 해군성 교육국원을 역임했다.[15]

2. 2. 해군 항공대 초창기 활동

오니시는 효고현 단바시 아시다 마을 출신으로, 1912년 해군병학교 40기로 졸업했다. 생도 144명 중 20등으로 졸업했으며, 사관후보생 기간 동안 순양함 소야와 순양전함 쓰쿠바에서 복무했고, 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전함 가와치에 배치되었다.[13]

중위 시절에는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에 배속되어 초기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 발전에 기여했다.[14] 1918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투기 개발 및 사용에 대해 배우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로 파견되기도 했다. 귀국 후 대위로 진급하여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에 배속되었고, 1920년대에는 해군 항공 관련 참모직을 역임하며 가스미가우라 해군 항공대에서 비행 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소령으로 진급한 후, 1928년 12월 10일 항공모함 호쇼의 항공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32년 11월 15일에는 항공모함 가가의 부장이 되었다.[23] 1939년 11월 15일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1항공함대참모장이 되었다.

오니시는 대함 거포주의를 버리고 항공 군비로 전환해야 한다는 항공 주병론을 주장했다.[14] 1935년에는 전함 야마토, 무사시 건조에 반대하며, 항공모함 건조를 주장하기도 했다.[26]

2. 3. 항공 주병론 주장과 전함 무용론

1916년 나카지마 비행기를 설립한 나카지마 치쿠헤이의 영향을 받아, 오니시는 항공 주병론 및 전함 무용론을 주장했다.[14] 1935년에는 야마토, 무사시 건조에 대해 "항공모함 세 척을 만들 수 있다"며 반대했다.[26] 후쿠도메 시게루 군령부 과장에게는 "야마토 건조비로 전투기 천 대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며 건조 중지를 요청했다.[27]

오니시는 대형기론(大形機論)을 지지하며 전투기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했다. 1935년 요코쿠 연구회에서 96식 육공의 우수성과 전투기의 짧은 항속거리 및 해상 항법 능력 부족을 들어 전투기 무용론을 주장했다.[28] 또한, 원호 전투기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29]

1937년 해군 항공 본부 교육부장 시절 "항공 군비에 관한 연구"라는 팸플릿을 통해 대형기가 전함의 역할을 대체하여 제해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잠수함을 제외한 함정은 항공에 대항할 수 없으며, 폭격기의 성능 향상으로 전투기와 대공 방어 포화는 불필요하다는 전투기 무용론도 폈다.[32] 수평 폭격의 낮은 명중률 때문에 수평 폭격 폐지론도 주장했으나,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속행 방침 선언으로 종식되었다.[33]

3. 중일 전쟁 참전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해군은 중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폭격 작전을 계획했다. 오니시 다키지로는 이 작전에 주요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초기에는 도양 폭격과 육해군 합동 작전을 지휘하고, 후에는 충칭 폭격과 제로센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 1. 제1연합항공대와 제2연합항공대 시절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듬해 8월 제1연합항공대(1련공) 사령관 토즈카 미치타로 대좌가 상하이 도양 폭격을 지휘했다. 군령부는 항공본부 교육부장 오니시를 타이베이 기지에 파견했다. 제주도 기지에서 오니시는 "대만의 사령부가 중공으로 전투기 사냥을 시키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근본을 뒤바꾼 작전이다"라고 말했다.[34]

오니시는 1937년 8월 15일과 16일 단 이틀간의 출격에서, 총 47기의 출격 기수 중 중국 공군 전투기의 격렬한 요격으로 6기가 격추되고 피탄 기체도 다수에 달하는 큰 손해를 입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 양저우로의 도양 폭격에 참가를 신청하여 96식 육상 공격기 2개 소대의 6기 중 제1소대의 3번기에 탑승할 예정이었지만, 출격 직전 화장실에 간 탓에, 가장 가까이 있던 2번기에 탑승했다. 제주도를 출격한 폭격대는 중국 대륙을 목표로 했지만, 도중에 악천후로 인해 제1소대가 길을 잃어 2개 소대는 별도로 행동하게 되었다. 제1소대는 목표를 푸커우로 변경하여 폭격을 하려 했지만, 중국군 전투기의 공격으로 오니시가 탑승할 예정이었던 3번기가 격추되었다. 양저우로 향한 제2소대는 중국군 전투기의 격렬한 요격으로 전멸했다. 전투기 무용론을 주장하던 오니시는 이 경험을 통해 폭격기로는 전투기에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35]

1938년, 오니시는 '마을의 발명가' 혼다 덴푸에게 "물로 가솔린을 만들 수 있다"라고 설득당해 해군 차관으로 승진한 야마모토와 항공본부장 도요다 사다지로 중장 등에게 설득하여 실험이 진행되었다. 1939년 1월, 오니시를 단장으로 하는 30명의 조사단 입회 하에 항공본부의 지하 실에서 실험이 시작되었다. 혼다는 입회인이 피로한 틈을 노려 미리 준비해 둔 가솔린이 들어있는 작은 병을 꺼내 실험은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수국에서 파견된 조사단원에게 사기 행위가 간파되어 혼다는 경찰에 넘겨졌다. 오니시는 "물을 주체로 하여 휘발유를 제조한다고 칭하는 발명 실험에 관한 전말 보고서"라는 58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36]

1938년 10월 19일, 제2연합항공대(2련공) 사령관이 되었다. 11월 4일, 오니시는 "2련공은 대거 주간 강습해야 한다."라고 명령하고, 스스로도 지휘관기에 동승하려 했다. 그러나 막료들은 죽으면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며 반대했고, 대신 제13항공대 사령관 오쿠다 키쿠지 대좌가 가는 것으로 설득했다. 이 출격에서 오쿠다는 전사했고, 유서에는 전사의 각오와 오니시에 대한 감사의 말이 있었다. 하지만 오니시는 부하들에게 "일단 출격에 임하여 죽음을 결심하는 것은 늦다. 무인의 죽음은 평소부터 충분히 각오해야 한다."라고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37]

1938년 12월 5일, 오니시는 육군의 제3비행집단을 방문하여 "육해군이 공동으로 란저우 (장개석 루트의 거점)를 공격하고 싶다."라고 신청했다. 이로 인해 12월 8일, 육해군에 의한 "백호 작전"이 결정되었다. 12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 동안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38]

1940년 5월 12일, 충칭 작전을 위해, 오니시는 제1연합항공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과 협력하여, 1련공과 2련공을 통합하여 "연합 공습 부대"를 창설했다. 지휘관은 야마구치가 맡았고, 참모장은 오니시가 맡았다.[39] 충칭 폭격과 관련하여 오니시는 "일본은 전쟁을 하고 있다. 영국은 지고 있다. 미국도 전쟁에 불만이 없을 것이다. 융단 폭격으로 괜찮다."라고 말했다.[40] 1940년 7월 10일, 야마구치는 충칭 폭격을 강행하려 했지만, 오니시는 "일주일만 기다리면 호위 전투기를 붙일 수 있다"라며 반대하여 대립했지만, 야마구치가 굽혔다.[41]

오니시는 제2연합항공대 사령관 겸 연합 공습 부대 참모장이면서, 폭격기에 스스로 탑승하여 진두지휘를 했다. 탑승하는 기체는 적 전투기에게 가장 먼저 노려지는 편대 꼬리 폭격기였다. 호위 전투기가 없는 폭격대들은 계속 손해를 입었지만, 1940년 9월 13일에 제로식 함상 전투기가 첫 실전에서 구식의 중국군 전투기를 격추시키자, 폭격기 탑승원의 위험이 격감했고 오니시도 가슴을 쓸어내렸다.[42] 1기의 손실 없이 27기 격추라는 데뷔를 장식한 제로식 함상 전투기였지만, 첫 실전에서 방탄의 약점이 지적되었다. 오니시는 "지금 논의는 기술 장교의 말대로다"라고 말하며 수습했다.[43]

3. 2. 충칭 폭격과 제로센 도입

1940년(쇼와 15년) 5월 12일, 충칭 작전을 위해 오니시는 제1연합항공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과 협력하여 1련공과 2련공을 통합, "연합 공습 부대"를 창설했다. 지휘관은 야마구치가 맡았고, 참모장은 오니시가 맡았다.[39] 오니시는 "일본은 전쟁을 하고 있다. 영국은 지고 있다. 미국도 전쟁에 불만이 없을 것이다. 융단 폭격으로 괜찮다."라고 주장했고, 야마구치는 중앙의 지시도 있었기에 "충칭에는 각국 대사관도 있으니 신중하게."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말다툼을 했지만, 야마구치가 "나도 철저하게 하고 싶지만 중앙에서 말하니."라고 하자 오니시도 "그게 전쟁이지."라고 대답했다.[40]

7월 10일, 야마구치는 충칭 폭격을 강행하려 했지만, 오니시는 "일주일만 기다리면 호위 전투기를 붙일 수 있다"라며 반대했다. 야마구치가 굽히면서 오니시는 훗날 "야마구치가 한 수 위였어"라고 회상했다.[41]

오니시는 도양 폭격 때처럼 제2연합항공대 사령관 겸 연합 공습 부대 참모장이면서도 폭격기에 직접 탑승하여 진두지휘를 했다. 그것도 탑승하는 기체는 적 전투기에게 가장 먼저 노려지는 편대 꼬리 폭격기였다. 호위 전투기가 없는 폭격대들은 계속 피해를 보았지만, 1940년 9월 13일에 제로식 함상 전투기가 첫 실전에서 구식 중국군 전투기를 일방적으로 격추하자, 폭격기 탑승원의 위험이 격감했고 오니시도 가슴을 쓸어내렸다.[42] 제로식 함상 전투기는 1기의 손실 없이 27기를 격추하는 선명한 데뷔를 장식했지만, 첫 실전에서 방탄의 약점이 지적되었다. 공전에 참가한 전투기 탑승원들은 "방탄 탱크를 장착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기술 장교는 제로센의 특성인 공전 성능과 항속 거리가 상실되므로 고속성, 전투성을 살려야 한다며 반대했다. 오니시는 "지금 논의는 기술 장교의 말대로다"라고 말하며 수습했다.[43]

4.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초기에 오니시는 군수성 해군 항공 개발부장이었으며,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지휘 아래 1941년 진주만 공격의 기술적 세부 사항에 관여했다. 오니시는 진주만 공격이 일본을 압도할 자원을 가진 적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져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공격에 반대했다.[3]

1943년 5월 1일에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제독으로서 오니시는 군인의 위기 상황 반응과 관련된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1938년에 그는 이 주제에 대한 책 "제국 해군의 전쟁 윤리"를 출판했다.

1944년 10월 이후, 오니시는 필리핀 북부 제1 항공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마리아나 제도를 잃고 쇼 작전을 앞두고 미 해군 항공모함 함대를 파괴하라는 명령에 직면한 오니시는 입장을 바꿔 가미카제 공격을 명령했다. 1944년 10월 19일 마닐라 근처 마발라카트 비행장(미군에게 클라크 공군 기지로 알려짐)에서 오니시는 제201 해군 비행단 본부를 방문하여 "내 생각에는 우리의 미미한 전력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250킬로그램 폭탄을 장착한 A6M 제로 전투기로 구성된 자살 공격 부대를 조직하여 각 비행기가 적 항공모함으로 급강하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말했다.[4] 그는 최초의 ''가미카제'' 부대에게 연설하며 그들의 정신의 고귀함이 패배 속에서도 조국을 멸망으로부터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5]

도쿄로 소환된 후, 오니시는 1945년 5월 19일에 일본 제국 해군 참모본부 부참모장이 되었다.[1]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오니시는 계속 싸울 것을 주장하며 일본인 2천만 명의 희생이 일본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6]

4. 1. 제11항공함대 참모장과 진주만 공격

왼쪽부터 모지 치카노리 부관, 고다마 요시오, 오니시 다키지로 해군 부제독. 1945년 2월, 대만 타이난 신사에서.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초기에 오니시는 군수성 해군 항공 개발부의 수장이었으며,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지휘 하에 1941년 진주만 공격의 기술적 세부 사항에 관여했다.[3] 오니시는 진주만 공격이 일본을 압도할 자원을 가진 적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져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공격에 반대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11 항공 함대는 일본이 점령한 대만에서 필리핀의 미군을 공격하는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

1941년(쇼와 16년) 1월 15일, 제11항공함대 참모장이 되었다.

같은 해 1월 14일경,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으로부터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에게 편지가 왔고, 1월 26일, 27일경, 오니시는 기함나가토에 탑승한 야마모토를 방문했다.[44] 야마모토가 오니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국제 정세의 추이에 따라서는, 어쩌면 미일 개전의 불가피한 상황에 이를지도 모른다. 미일이 을 들고 서로 싸울 경우, 우리 측으로서는, 뭔가 대단히 과감한 전법을 취하지 않으면 승리를 거머쥘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전 초두에, 하와이 방면에 있는 미국 함대의 주력에 대해, 우리 제1, 제2항공전대 비행기대의 전력을 다해, 통렬한 타격을 가하여, 당분간 미국 함대의 서태평양 진출을 불가능하게 해야 한다. 목표는 미국 전함이며, 공격은 뇌격대에 의한 편도 공격으로 한다. 본 작전은 쉽지 않지만, 본직이 직접 이 공습 부대의 지휘관을 맡아, 작전 수행에 전력을 다할 결의이다. 따라서, 이 작전을 어떤 방법으로 실시하면 좋을지 연구해 주었으면 한다."라는 요지였다.[45] 야마모토는 오니시에게 "귀관(오니시)은 해군대학교 출신이 아니므로, 해대 출신과 같은 틀에 박힌 발상은 하지 않을 것이고, 부디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말고, 자유자재로 생각해주었으면 한다"라는 이유로 연구를 의뢰했다.[46]

오니시는 가노야 사령부로 돌아가 막료인 마에다 다카나리에게 자세한 내용을 숨긴 채 진주만 공격에서의 뇌격에 대해 상담했지만, 진주만은 얕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44] 2월 초순, 겐다 미노루를 불러 야마모토의 편지를 보여주고 같은 질문을 했다. 겐다는 "뇌격은 전문이 아니어서 알 수 없지만, 연구하면 어렵더라도 불가능하지 않으며, 못하더라도 치명상을 입히는 것을 생각해야 하며, 항공모함으로 좁혀보면 급강하 폭격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접근 행동에 있다."라고 답했다.[44][47] 오니시는 기밀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고 싶어 하며, "공격은 성과가 확인 가능한 낮이 좋다."라고 말했다.[47] 오니시는 겐다에게 작전 계획안을 빨리 만들도록 의뢰하여, 겐다는 2주 정도에 완성하여 제출, 거기에 오니시가 수정을 더하여 3월 초순경 야마모토에게 제출했다.[44] 오니시는 전함에는 함상 공격기의 수평 폭격을 하고, 출발 지점을 에토로후 섬단항 만으로 하는 안을 정리했다.[48] 9월경, 겐다가 오니시로부터 참고용으로 받은 자료에는 "뇌격이 불가능하더라도 함공은 내리지 않고, 소형 폭탄을 다수 탑재하여 보조 함정에 공격을 가하고, 전함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더라도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49]

오니시는 "미일 전쟁에서는 무력으로 미국을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에 조기 전쟁 종결을 생각하고, 장기전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진주만 공격과 같이 미국을 강하게 자극하는 작전은 피해야 한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941년(쇼와 16년) 9월 24일 군령부에서 구사카 류노스케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비관론"에 동조하고, 10월 초순에는 두 사람이 야마모토에게 필리핀 작전을 지원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오니시는 구로시마 가메토에게 설득당한다.[51] 야마모토는 오니시와 구사카에게 "하와이 기습 작전은 단행한다. 양 함대 모두 많은 무리나 어려움이 있겠지만, 하와이 기습 작전은 꼭 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으로 준비를 진행해주기 바란다."라며 "내가 아무리 브리지포커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렇게 투기(도박)적이다, 투기적이다라고 말하지 말아줘. 너희들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내 말도 잘 연구해줘"라고 말했다.[52] 그 후, 항공 어뢰의 문제는 91식 어뢰에 안정기를 장착하는 것으로 해결되었지만, 기밀 유지의 문제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며 보류되었다.[53]

태평양 전쟁 개전 시, 필리핀 공략전에 참가했다. 제3항공대는 제로센의 항속 거리 문제로, 당초 소형 항공모함에 탑재하여 해상에서 필리핀을 공격하는 계획이었지만, 비행대장 시바타 다케오 중좌는 전투기가 항공모함에서 출격하면 육상 공격기와의 협동 작전이 곤란하고, 중일 전쟁 때 제로센은 430해리(796km) 진공 경험이 있으며 연료 소비량을 조정하면 500해리(926km)도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10월 초순 가노야 도상 훈련에서 제3항공대는 제로센에 의한 마닐라 주변 직접 공격을 제안했다.[54] 그러나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는 "너의 의견은 비행 실험적인 의견에 불과하다"고 일축했고,[55] 사령부도 실적이 없고 작전 변경에 자료가 부족하다며 기각했다.[54] 제3항공대는 항속력 연장 연구를 했고, 가메이 가이오 사령은 10월 말 공중전, 사격 훈련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으니 착함 훈련은 불가능하며 항공모함 사용은 그만두어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오니시는 가메이의 의견서를 승낙하며 "알았다. 반드시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납득시키겠다. 이후, 공중전, 야간 편대 발진, 원거리 침공에 필요한 훈련을 하라."고 약속했다.[55][56]

오니시의 노력으로 진주만 공격과 같은 날, 해군 항공대의 제로센 84기와 1식 육상 공격기・96식 육상 공격기 합계 106기에 의한 필리핀 클라크 필드와 이바 필드 공격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습을 당한 미국군은 몇 대의 전투기를 이륙시키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격추되었으며, 육공의 폭격과 제로센의 기총 소사로 잇따라 격파되었다. 이 공격으로 개전 첫날 필리핀 항공 전력은 절반으로 줄었다.

4. 2. 필리핀 공략전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초기에 오니시는 군수성 해군 항공 개발부의 수장이었으며,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지휘 하에 1941년 진주만 공격의 기술적 세부 사항에 관여했다. 오니시는 진주만 공격이 일본을 압도할 자원을 가진 적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져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공격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11 항공 함대는 일본이 점령한 대만에서 필리핀의 미군을 공격하는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

1942년 (쇼와 17년) 3월 1일, 항공 본부 출사로서 내지로 귀환하는 도중, 연합 함대 사령부가 있는 기함 야마토를 방문하여 필리핀, 란인 방면의 작전 상황을 보고했다. 그 당시에 소견으로서, 군비의 중심은 항공이며, 전함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 병기로 전락했다고 설했지만,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로부터 필리핀이나 란인 등의 육지로 이어진 작전에서 결론을 내는 것은 너무 빠르다는 반론을 받았다.[57]

태평양 전쟁 개전 시 필리핀 공략전에 참가했다. 제3항공대는 제로센의 항속 거리 문제로, 당초에는 소형 항공모함에 탑재하여 해상에서 필리핀을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비행대장 시바타 다케오 중좌는 전투기가 항공모함에서 출격해서는 육상 공격기와의 협동 작전이 곤란하며, 중일 전쟁 때 제로센은 430해리(796킬로미터) 진공 경험이 있고 연료 소비량을 조정하면 500해리(926킬로미터)도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10월 초순 가노야 도상 훈련에서 제3항공대는 제로센에 의한 마닐라 주변 직접 공격을 제안했다.[54] 그러나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는 "너의 의견은 비행 실험적인 의견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고,[55] 사령부도 실적이 없고 작전 변경에는 자료가 부족하다고 기각했다.[54] 제3항공대는 항속력 연장 연구를 했고, 가메이 가이오 사령은 의견서로 10월 말 공중전, 사격 훈련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으니 착함 훈련은 불가능하며 항공모함 사용은 그만두어야 한다는 내용을 제출했다. 오니시는 가메이의 의견서를 승낙하며 "알았다. 반드시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납득시키겠다. 이후, 공중전, 야간 편대 발진, 원거리 침공에 필요한 훈련을 하라."고 자신이 책임을 지고 야마모토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다. 시바타는 이때만큼 인간 오니시의 위대함을 느낀 적은 없다고 한다.[55][56]

오니시의 노력으로 진주만 공격과 같은 날 해군 항공대의 제로센 84기와 1식 육상 공격기・96식 육상 공격기 합계 106기에 의한 필리핀 클라크 필드와 이바 필드 공격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습을 당한 미국군은 몇 대의 전투기를 이륙시키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격추되었다. 육공의 폭격과 제로센의 기총 소사로 잇따라 격파되어 개전 첫날 필리핀 항공 전력은 절반으로 줄었다. 이후에도 일본군 항공 공격은 계속되어 12월 13일 잔존기는 20기 이하가 되었고, 미국 극동 육군 항공대는 아무 성과 없이 괴멸되었다. 미국 극동 육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만년까지 제로센이 타이완이 아닌 필리핀 근해 항공모함에서 출격했다고 믿었다.

4. 3. 군수성과 항공병기총국 시절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초기, 오니시는 군수성 해군 항공 개발부장이었으며,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지휘 아래 1941년 진주만 공격의 기술적 세부 사항에 관여했다.[3] 오니시는 진주만 공격이 일본을 압도할 자원을 가진 적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져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공격에 반대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11 항공 함대는 일본이 점령한 대만에서 필리핀의 미군을 공격하는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

1943년 5월 1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4] 제독으로서 오니시는 군인의 위기 상황 반응과 관련된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1938년에는 이 주제에 대한 책 "제국 해군의 전쟁 윤리"를 출판했다.[4]

1944년 10월 이후, 오니시는 필리핀 북부 제1 항공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4] 그는 연합군 항공모함에 대한 자살 항공 공격(''가미카제'') 전술을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계획은 그의 재임 전에 시작되었으며, 그는 원래 "이단"으로 반대했다.[4] 마리아나 제도를 잃고 쇼 작전을 앞두고 미 해군 항공모함 함대를 파괴하라는 명령에 직면한 오니시는 입장을 바꿔 공격을 명령했다.[4] 1944년 10월 19일, 마닐라 근처 마발라카트 비행장(미군에게 클라크 공군 기지로 알려짐)에서 오니시는 제201 해군 비행단 본부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미미한 전력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250킬로그램 폭탄을 장착한 A6M 제로 전투기로 구성된 자살 공격 부대를 조직하여 각 비행기가 적 항공모함으로 급강하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4]

그는 최초의 ''가미카제'' 부대에게 연설하며 그들의 정신의 고귀함이 패배 속에서도 조국을 멸망으로부터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5] 도쿄로 소환된 후, 1945년 5월 19일에 일본 제국 해군 참모본부 부참모장이 되었다.[1]

전쟁이 끝나기 직전, 오니시는 계속 싸울 것을 주장하며 일본인 2천만 명의 희생이 일본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6]

5. 가미카제 특공대 창설과 지휘



오니시 다키지로는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말기에 가미카제 특공대를 창설하고 지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44년 10월 이후 필리핀 북부의 제1 항공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4] 그는 연합군 항공모함에 대한 자살 항공 공격(''가미카제'') 전술을 고안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계획은 그의 재임 전에 시작되었으며, 그는 원래 "이단"으로 반대했다.[4] 마리아나 제도를 잃고, 쇼 작전을 앞두고 미 해군의 항공모함 함대를 파괴하라는 명령에 직면한 오니시는 입장을 바꿔 공격을 명령했다.

1944년 10월 19일, 마닐라 근처의 마발라카트 비행장(미군에게 클라크 공군 기지로 알려짐)에서 오니시는 제201 해군 비행단 본부를 방문하여 "250킬로그램 폭탄을 장착한 A6M 제로 전투기로 구성된 자살 공격 부대를 조직하여 각 비행기가 적 항공모함으로 급강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 그는 최초의 ''가미카제'' 부대에게 연설하며 그들의 정신의 고귀함이 패배 속에서도 조국을 멸망으로부터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5]

도쿄로 소환된 후, 오니시는 1945년 5월 19일에 일본 제국 해군 참모본부 부참모장이 되었다.[1]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오니시는 계속 싸울 것을 주장하며, 일본인 2천만 명의 희생이 일본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6]

5. 1. 특공 전술의 등장 배경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초기, 오니시는 군수성 해군 항공 개발부의 수장이었으며,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지휘 아래 1941년 진주만 공격의 기술적 세부 사항을 담당했다.[3] 오니시는 진주만 공격이 일본을 압도할 자원을 가진 적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져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공격에 반대했다.[3]

1941년 1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오니시에게 미일 개전 시 과감한 전법으로 미 함대에 타격을 가할 방법을 연구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45] 야마모토는 해군대학교 출신이 아니라 틀에 박힌 발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오니시에게 연구를 의뢰했다.[46] 오니시는 제1항공전대 참모 겐다 미노루에게 작전 계획안을 만들도록 했고, 3월 초순경 야마모토에게 제출했다.[44]

오니시는 "미일 전쟁에서 무력으로 미국을 굴복시킬 수 없으므로 조기 종전을 생각하고 장기전을 피해야 하며, 진주만 공격처럼 미국을 자극하는 작전은 피해야 한다"라는 견해를 밝혔다.[50] 1941년 9월, 오니시는 구사카 류노스케의 진주만 공격 비관론에 동조했고, 10월 초에는 야마모토에게 필리핀 작전을 지원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구로시마 가메토에게 설득당했다.[51]

태평양 전쟁 개전 시, 오니시는 필리핀 공략전에 참가했다. 제3항공대는 제로센의 항속 거리 문제로 항공모함 탑재를 계획했으나, 비행대장 시바타 다케오는 육상 공격기와의 협동 작전 곤란, 중일 전쟁 당시 제로센의 장거리 비행 경험을 들어 반대했다.[54] 오니시는 이를 일축했지만,[55] 가메이 가이오 사령의 의견서를 승낙하고 야마모토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다.[55][56]

오니시의 노력으로 제로센과 1식 육상 공격기, 96식 육상 공격기에 의한 필리핀 클라크 공군 기지와 이바 필드 공격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공격으로 개전 첫날 필리핀 항공 전력은 절반으로 줄었고, 미국 극동 육군 항공대는 괴멸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로센이 타이완이 아닌 필리핀 근해 항공모함에서 출격했다고 믿었다.

1944년 10월, 오니시는 필리핀 북부 제1 항공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가미카제 특공 전술을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계획은 그의 재임 전에 시작되었고, 그는 원래 반대했다.[4] 마리아나 제도를 잃고 미 해군 항공모함 함대 파괴 명령에 직면한 오니시는 입장을 바꿔 공격을 명령했다. 1944년 10월 19일, 마닐라 근처 마발라카트 비행장에서 오니시는 A6M 제로 전투기에 250kg 폭탄을 장착하여 적 항공모함에 급강하하는 자살 공격 부대를 조직하는 방법을 제안했다.[4]

오니시는 특공을 "통솔의 외도"라고 생각했지만,[137] 당시 상황에서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22][223] 그는 "청년의 순수, 가미카제를 일으킨다"는 글을 자주 썼고, "일본을 구할 수 있는 것은 30세 이하 젊은이들의 몸을 부딪치는 정신과 실행"이라고 말했다.[161]

5. 2. 가미카제 특공대의 작전과 피해

오니시 다키지로는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에서 가미카제 특공 작전을 고안하고 지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전술은 오니시가 제1항공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계획되었고, 오니시는 처음에는 "이단"이라며 반대했다.[4] 마리아나 제도를 잃고 미 해군 항공모함 함대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은 오니시는 결국 입장을 바꿔 1944년 10월 19일, 마닐라 근처 마발라카트 비행장에서 자살 공격 부대, 즉 가미카제 특공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4]

오니시는 "250킬로그램 폭탄을 장착한 A6M 제로 전투기로 구성된 자살 공격 부대를 조직하여 각 비행기가 적 항공모함으로 급강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 그는 최초의 가미카제 부대원들에게 그들의 정신이 패배 속에서도 조국을 지킬 것이라고 연설했다.[5]

하지만, 가미카제 특공대 이외를 포함한 "특공의 생모"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오니시가 제1항공 함대 사령관이 되기 전부터 특공의 지지자였다는 인식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견해[206]와 그 이전에 특공은 중앙에서 연구되고 있었으므로 오해라는 견해가 있다. 가미카제 특공대에 관해서는 중앙에서 연구하는 특공과는 별개이며, 오니시로부터 중앙에 사전 보고가 있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는 오니시 고유의 움직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207]

실제로 1944년 4월에는 인간 어뢰 "가이텐"의 개발이 시작되었고,[208] 9월에는 "해군 특공부"가 발족하여 오모리 센타로 중장이 책임자로 임명되는 등, 해군은 오니시가 가미카제 특공대 시작을 검토하기 전부터 조직적으로 특공 개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209] 일본 육군은 더 이른 시기부터 항공 특공을 조직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210]

오니시는 군수국 요직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력을 잘 알고 있었고, 중유, 휘발유는 반 년도 버티지 못하고 모든 기능이 정지될 것이며, 더 이상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219] 그는 강화해야 하지만, 전황도 좋지 않고 자재도 없는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레이테에서 반격하고, 7:3의 조건으로 강화하고 만주 사변 즈음까지 일본을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리핀을 마지막 전장으로 하고, 특공을 하면 천황도 전쟁을 멈추라고 말할 것이며, 이 희생의 역사가 일본을 재흥할 것이라고 말했다.[219][220]

오니시는 특공을 "통솔의 외도"라고 생각했지만,[137] 당시의 기재와 탑승원의 기량으로는 보통 공격을 해도 적의 먹잇감이 될 뿐이므로, 몸을 부딪치는 공격을 하여 큰 효과, 전과를 확신하고 죽을 수 있는 특공은 젊은이에게 죽을 곳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22][223] 그는 "일본 정신의 마지막 발로는 특공이며 특공에 의해 조국의 난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225]

전쟁 말기, 오니시는 "2천만 명의 일본인을 특공으로 사용하면 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1억 총 옥쇄'를 언급하기도 했다.[212][213]

5. 3. 비판과 논란

오니시 다키지로는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에서 가미카제 특별 공격대를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83] 하지만, 가미카제 특공대 이외의 "특공의 생모"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제1항공 함대 사령관이 되기 전부터 특공을 지지했다는 인식[206]과 그 이전에 이미 중앙에서 특공을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라는 견해[207]가 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중앙에서 연구하던 특공과는 별개로, 오니시가 중앙에 사전 보고는 했지만 독자적으로 추진한 것이었다.[207]

1944년 4월에는 이미 인간 어뢰 "가이텐" 개발이 시작되었고[208], 같은 해 9월 13일에는 "해군 특공부"가 발족하여 오모리 센타로 중장이 책임자로 임명되는 등, 해군은 오니시가 가미카제 특별 공격대 시작을 검토하기 전부터 조직적으로 특공 개시를 준비하고 있었다.[209] 일본 육군 또한 1944년 3월부터 함선에 몸을 부딪치는 항공 특공 전법을 검토하고[210] 기재 연구에도 착수하는 등[211], 해군보다 먼저 항공 특공을 조직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3일, 오니시는 도고 외무대신, 도요다, 우메즈 양 총장과의 회담에서 "2천만 명의 일본인을 특공으로 사용하면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12] 이는 유명한 "2천만 명 특공 발언"으로, 전쟁 말기 해군 군령부 차관 시절 회의 등에서 "1억 총 옥쇄"를 주장했다는 기록도 있다.[213] 당시 일본 인구가 7천만 명이었기 때문에 "1400만 명 특공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215] 오니시는 대만 시절 부관이었던 모지에게 "일본인의 1/5이 전사하기 전에 적이 먼저 항복할 것"이라고 훈시한 적도 있다.[214]

제로센의 격추왕 가쿠타 가즈오의 증언에 따르면, 오니시는 군수국의 요직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력을 잘 알고 있었고, 중유와 휘발유 부족으로 모든 기능이 정지될 것이므로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화 조건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레이테 만 해전에서 반격하고, 만주 사변 이전으로 일본을 되돌리려 했다. 그는 필리핀을 마지막 전장으로 삼고, 특공을 통해 천황이 전쟁을 멈추도록 하고, 이 희생이 일본 재건의 역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219][220]

오니시는 특공을 "통솔의 외도"라고 생각했지만,[137] 당시 상황에서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적의 먹잇감이 될 뿐이므로, 특공을 통해 큰 효과와 전과를 확신하고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젊은이들에게 주는 것이 대자비라고 주장했다.[222][223] 그는 "일본을 구할 수 있는 것은 30세 이하의 젊은이들"이라며, 그들의 정신과 실행이 일본을 구할 것이라고 믿었다.[161] 그는 부관 모지 치카노리에게 "백 년 후에도 평가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224] 후쿠도메 시게루에 따르면, 오니시는 "일본 정신의 마지막 발로는 특공이며 특공에 의해 조국의 난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225]

도가와 유키오 기자가 "특공으로 일본은 미국을 이길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오니시는 "이길 수 없더라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물량이 많은 미국이라도 일본 국민을 근절할 수는 없다. 승패는 마지막에 있다. 아흔아홉 번 져도 마지막에 한 번 이기면 그것이 이기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국민 전체가 특공 정신을 발휘하면 비록 졌더라도 일본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217][226]

요시오카 타다이치는 "이제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니시는 이겨도 자결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27] 요시마츠 마사히로는 오니시가 제1항공 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것은 특공도 어쩔 수 없다는 중앙의 판단과 항공 관계자들에게 인망이 있던 오니시를 적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84] 겐다 미노루는 "오니시의 입장에 서면,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야마구치 타몬도 같은 짓을 했을 것이고, 그들 자신도 특공기에 탑승하여 출격했을 것이다. 그것이 해군 군인이다"라고 말했다.[228] 모지 치카노리는 "젊었다면 오니시도 대장으로서 맨 먼저 특공으로 갔을 것이다. 오니시는 그들만 죽게 할 생각은 없다고 느껴져 별세계였다."고 말했다.[229]

6. 종전과 자결

오니시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다음 날, 시부야 미나미다이마치의 관사에서 개작 없이 할복자결했다.[7] 그는 가이샤쿠닌 없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혀 15시간에 걸쳐 사망했다. 그의 유서에는 특공대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속죄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일본 재건과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2]

1945년 8월 16일 오전 2시에서 3시경, 오니시는 배를 십자로 가르고 목과 가슴을 찔렀으나, 바로 숨을 거두지는 않았다. 관사 사용인이 이를 발견하고 다다 타케오 차관이 군의를 데려왔으며, 고다마 요시오 등도 급히 달려왔다. 오니시는 군의에게 살려내지 말 것을 요구했고, 코다마에게는 아쓰기의 코조노에게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자신의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코다마 역시 자결하려 했으나, 오니시는 "젊은이들은 살아서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야 한다"며 그를 만류했다.[190]

종전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해군은 영구차나 관을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결국 종병들이 뜰의 나무를 베어 관을 만들었고, 빌려온 트럭으로 오니시의 시신을 화장터로 운반해야 했다. 오니시는 평소 꽃을 좋아했지만, 바칠 꽃조차 없어 다다의 아내가 화장터로 가는 길에 발견한 협죽도 꽃을 꺾어 바쳤다고 한다.[191] 화장터 근처에 이르자 아쓰기 방면에서 날아온 제로센이 낮은 고도로 다가와 마치 인사하듯 날개를 흔들고 사라졌다고 한다.

오니시의 유서는 총 5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특공대의 영령에게 말한다"로 시작하는 유서는 자신의 죽음으로 옛 부하들의 영령과 유족에게 사죄하고, 일반 청년들에게는 경거망동을 삼가고 일본의 부흥과 발전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아내에게 남긴 유서에는 모든 것을 아내의 뜻에 맡기고, 안락함을 탐하지 말고 세상을 위해 살아가라는 내용과 함께 "이것으로 좋으리라 백만 년의 덧없는 잠이여"라는 사세구가 적혀 있었다.[12] 친구 마스야 린에게는 "상쾌하구나, 폭풍우가 지난 뒤 달은 맑구나"라는 사세구를 남겼다.[192][193]

6. 1. 종전 직전의 행보

1945년 8월 16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직후 오니시는 자신의 거처에서 의례적인 자살(''할복'')을 했다.[7] 고다마 요시오가 이를 지켜봤지만, 세푸쿠를 하지는 않았다.[7] 오니시의 유서는 그가 죽음으로 내몬 약 4,000명의 조종사들에게 사과하는 내용이었으며, 전쟁에서 살아남은 모든 젊은 시민들에게 일본을 재건하고 국가 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죽음을 ''가미카제'' 조종사와 그 가족들에게 속죄로 바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일반적인 보조자(''가이샤쿠닌'')를 사용하지 않았고, 스스로 가한 부상으로 15시간에 걸쳐 사망했다.

오니시가 자살에 사용한 칼은 도쿄 유슈칸 박물관의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 오니시의 유해는 두 개의 묘에 나누어졌다. 하나는 요코하마 쓰루미구에 있는 소지사 사찰에, 다른 하나는 효고현의 옛 아시다 마을에 있는 공립 묘지에 안치되었다.

6. 2. 포츠담 선언 수용 반대와 최후

오니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이루어진 1945년 8월 16일, 자신의 거처에서 세푸쿠 의식으로 자결했다.[7] 고다마 요시오가 이를 지켜봤지만, 이후 세푸쿠를 하지는 않았다.[7] 오니시의 유서는 그가 죽음으로 내몬 약 4,000명의 조종사들에게 사과하는 내용이었으며, 전쟁에서 살아남은 모든 젊은 시민들에게 일본을 재건하고 국가 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죽음을 ''가미카제'' 조종사와 그 가족들에게 속죄로 바치겠다고 밝혔다. 그는 가이샤쿠닌 없이 스스로 가한 부상으로 15시간에 걸쳐 사망했다.

1945년 8월 16일, 시부야 미나미다이마치의 관사에서 오니시는 유서를 남기고 "개작 없이" 할복자결했다. 오전 2시부터 3시경에 배를 십자로 갈라 목과 가슴을 찔렀지만 살아 있었다. 관사 사용인이 발견하여 다다 타케오 차관이 군의를 데리고, 마에다 부관, 코다마 요시오도 급히 달려왔다. 오니시는 군의에게 "살게 하지 말아달라"고 말했고, 코다마에게 "네가 준 칼이 잘 들지 않아 다시 만났군. 모든 것은 그 유서에 적혀 있다. 아쓰기의 코조노에게 경거망동은 삼가라고 오니시가 말했다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코다마도 자결하려 하자 오니시는 "바보 녀석, 네가 죽어 쓸모가 있겠느냐. 젊은 놈들은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라"고 타이르며 말렸다. 그는 개작과 연명 처치를 계속 거부한 채, 같은 날 저녁에 사망했다. 향년 55세였다.

종전의 혼란으로 해군에서는 영구차는커녕 관을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워, 종병이 뜰의 나무를 베어 관을 직접 만들었다. 영구차는 결국 마련할 수 없어, 화장터에는 빌려온 트럭으로 운반하게 되었다. 오니시는 꽃을 좋아했지만, 바칠 꽃조차 없었기에, 다다의 아내가 화장터로 가는 길에서 발견한 협죽도 꽃을 꺾어 오니시에게 바쳤다.[190] 화장터에 가까워지자, 아쓰기 방면에서 날아온 제로센이 낮은 고도로 돌진해 와, 트럭 위에서 인사를 하듯 날개를 흔들고 어디론가 날아갔다.[191]

유서는 5통이 있었다고 한다. "특공대의 영령에게 말한다"로 시작하는 유서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옛 부하의 영령과 그 유족에게 사죄하고, 또한 일반 청장년에게 경거망동을 삼가고 일본의 부흥, 발전에 힘쓸 것을 타이르는 내용이었다. 아내인 스케 (요시코)에게 보낸 유서에는, 모든 것을 스케의 소신에 일임하고, 안일을 탐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 천수를 다할 것, 본가와 친목을 유지할 것, 다만 반드시 오니시의 가문에서 후계자를 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것으로 좋으리라 백만 년의 덧없는 잠이여"라는 사세구가 있었다. [12] 또한 사세구로 친구인 마스야 린에게 "상쾌하구나, 폭풍우가 지난 뒤 달은 맑구나"라고 읊었다[192][193] 특공대원의 전사자 명단에도 오니시의 이름이 새겨졌다.

7. 사후 평가와 논란

오니시 다키지로는 1945년 8월 16일 할복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가미카제 특공대 운용에 대한 책임 문제와 더불어, 전후 일본 사회에서 다양한 평가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42년 해군 항공 본부 총무부장 시절, 오니시는 "내각총리대신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은 서류 중개인에 불과하며, 전함 대신 공군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다.[58]

그의 아내 스케는 전후 생활고 속에서도 남편과 특공대원들의 위령에 힘썼으며, 1952년 쓰루미 소지사 경내에 오니시의 묘와 해응관음상을 건립했다.

7. 1. 가미카제 특공대에 대한 책임 문제

1941년 1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에게 진주만 공격에 대한 연구를 의뢰했다.[44] 오니시는 진주만의 수심이 얕아 뇌격이 어렵다고 판단했지만, 겐다 미노루는 급강하 폭격으로 충분하며,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44][47] 오니시는 겐다에게 작전 계획안을 만들게 하여 야마모토에게 제출했다.[44]

오니시는 요시오카 주이치에게 "미일 전쟁에서는 무력으로 미국을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에 조기 전쟁 종말을 생각하고, 장기 전쟁이 되는 것은 최대한 피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진주만 공격과 같이 미국을 강하게 자극하는 작전은 피해야 한다"라는 견해를 밝혔다.[50] 1941년 9월 24일, 군령부에서 오니시는 구사카 류노스케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비관론"에 동조했고, 10월 초순에는 두 사람이 야마모토에게 필리핀 작전을 지원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오니시는 구로시마 가메토에게 설득당했다.[51]

태평양 전쟁 개전 시, 오니시는 필리핀 공략전에서 제로센의 항속 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3항공대는 제로센의 항속 거리가 충분하다고 주장했지만, 오니시는 처음에 이를 일축했다.[54][55] 그러나 가메이 가이오 사령의 의견서를 받고 야마모토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하며, 제로센에 의한 마닐라 주변 직접 공격을 승인했다.[55][56]

오니시의 노력으로 1941년 12월 8일, 일본 해군 항공대는 클라크 필드와 이바 필드에 대한 공격에 성공하여, 필리핀의 미군 항공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로센이 필리핀 근해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했다고 믿었다.

1942년 9월, 미국에서 귀국한 동급생 도쿠다 도미지에게 오니시는 "진주만 공격은 그걸로 괜찮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안 된다니까." "그건 좋지 않았어. 그런 짓을 한 탓에, 미국 국민의 의지 (반일 감정)를 결집시켜 버렸어. 그게, 요즘의 해전에 나타나고 있어."라고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미국의 반일 감정이 강해졌음을 한탄했다.[59]

7. 2. 전후 일본 사회의 인식과 추모

오니시 다키지로는 1945년 8월 16일 할복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아내 스케는 남편의 죽음 이후, 전후 일본 사회에서 오니시와 특공대원들에 대한 추모와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케는 주변의 재혼 권유를 거절하고 오니시와 특공대원들의 위령에 힘썼다. 많은 고급 군인들의 미망인들이 그러했듯, 스케 역시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사탕 행상 등으로 번 돈을 조금씩 모아 남편의 묘를 세우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생활 속에서도 특공대원들의 위령 법요에 참석하여 "남편이 유족의 자제분들과 여러분을 전쟁으로 이끌었습니다. 사과의 말씀도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때로는 꿇어앉아 사죄했다.[191] 전 특공대원들과 유족들은 스케의 진심 어린 태도에 감동하여 오니시를 개인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191]

1952년, 스케는 전 해군 동료들의 원조를 받아 쓰루미 소지사 경내에 오니시의 묘를 세울 수 있었다. 묘 왼쪽에는 "해응관음"상이 있는데, 이는 "고인은 특공대에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했으니, 특공으로 산화하신 분들을 모시는 관음님을 고인의 묘와 나란히 세우고 싶다"는 스케의 바람으로 세워진 것이다. 스케는 행상 등으로 모은 돈 전부를 이 일에 쏟아부었다.[192]

1955년, 스케가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게 된 전 해군 항공대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는 자신이 경영하던 인쇄 회사에 스케를 사장으로 맞아 생활을 지원했다. 사카이는 타이난 항공대 시절 상관으로 존경했던 사사아 준이치 소좌가 오니시의 조카였고, 해군 항공의 선구자적인 존재인 오니시를 존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케를 회사 경영에 참여시킴으로써 오니시를 존경하는 전 해군 관계자들의 협력을 얻기 쉬워진다는 계산도 있었다. 실제로 사카이의 회사에는 후쿠도메 시게루나 테라오카 킨페이 같은 전 해군 거물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정계의 흑막적인 존재인 사사카와 료이치도 관계했다.[193]

1960년대 중반, 스케는 사카이의 회사 사장직에서 물러나 공단 주택으로 이사했다. 스케의 집에는 오니시의 절친한 친구 타다 타케오의 아내 요시코,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한 오니시의 동기 야마구치 타몬의 아내 타카 등 해군 관계자들이 자주 방문했다. 1963년에는 오니시의 묘석을 더 크게 재건하고, 오니시의 동기인 테라오카의 글씨로 된 "오니시 타키지로 군의 비"가 묘와 "해응관음" 옆에 세워졌다. 이 비용은 오니시가 생전에 각별히 친분을 맺고 자결할 때 가장 먼저 달려온 고다마 요시오가 지원했다.[194]

1974년, 오니시에게 훈1등 욱일대수장 추서 소식이 있었고, 스케가 대신 받았다. 1977년 병으로 입원한 스케는 "이 훈1등 욱일대수장은 오니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젊은 특공대 분들을 대표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니시는 착용할 수 없으니, 여러분이 가슴에 달고 사진을 찍어주세요."라며 기증했고, 이는 육상자위대 쓰치우라 주둔지 내의 예과 연습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195]

스케는 1978년 2월 6일 "나는, 덕을 봤어"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몬지 치카노리(전후에는 일본흥업은행에 복직하여, 동행 이사 총무부장, 마루산 증권 사장을 역임)는 이 말을 "오니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자결했기에, 나(스케)는 모두에게 용서받고 부드럽게 대해졌으며, 오히려 소중히 여겨졌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스케의 장례식에는 제1항공함대 선임 참모였던 이노구치 리키헤이가 장례 위원장을 맡았고, 많은 해군 관계자들이 참석했으며, 스케를 친어머니처럼 따랐던 전 특공대원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96]

2000년, 오니시의 사후 55년, 스케의 사후 22년이 지난 후, 오니시의 묘 옆에 "유서의 비"가 세워졌다. 발기인인 몬지 치카노리에 의해 오니시의 기일인 8월 16일에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8. 인물됨과 사상

오니시 다키지로는 1891년 6월 2일 효고현 히카미군 아시다 촌(현 단바시 아오가키 정)에서 태어났다. 구제 카시와바라 중학교 시절 일본해 해전 승전 소식을 접하고 히로세 다케오 중좌를 숭배했다.[11] 해군병학교에서는 봉 쓰러뜨리기 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검도유도 실력도 뛰어났으며, '싸움 타키베'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2] 1912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13]

1915년 항공술 연구원이 되어 비행 조종술을 배웠고,[14] 1916년 나카지마 지쿠헤이가 비행기 제작 회사를 설립할 때 대함 거포주의를 버리고 항공 군비로 전환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항공 주병론을 주장하게 되었다.[14]

1918년 영불 유학 후, 셈필 교육단 강습에 참가하여 일본 최초로 낙하산 강하를 했다.[15] 1924년 해군대학교 갑종 시험에 응시했으나, 요정에서 게이샤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건으로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17][18]

1928년 이노우에 시로 중좌의 중매로 마쓰미 요시코와 결혼했다.[20] 당시 오니시는 게이샤 놀이를 즐겼고, 결혼에 소극적이었지만, 요시코 어머니의 권유로 결혼했다.[21]

1932년 제3함대 참모, 가가 부장을 거치며 조종사들에게 엄격한 훈련을 실시했다.[23] 1934년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 부대장 겸 교두 시절부터 항공 주병론을 더욱 강화했다. 1935년 야마토형 전함 건조에 반대하며 전투기 무용론을 주장했다.[26][27][28]

1936년 해군 항공 본부 교육부장에 취임하여 96식 함상 전투기 성능 평가를 통해 전투기 무용론을 재확인하려 했다.[30] 1937년 "항공 군비에 관한 연구" 팸플릿을 통해 전략 폭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수평 폭격 폐지론을 주장했다.[32]

1941년 제11항공함대 참모장으로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진주만 공격 작전 연구에 참여했다. 그러나 오니시는 미일 전쟁의 장기화를 우려하여 진주만 공격에 반대했다.[50] 태평양 전쟁 개전 후 필리핀 공략전에서 제로센을 활용한 공격을 성공시켜 미국 극동 육군 항공대를 괴멸시켰다.[55][56]

1942년 해군 항공 본부 총무부장, 1943년 군수성 항공병기총국 총무국장을 역임하며 항공기 증산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일본 해군의 작전 지도를 비판하며 전선 축소를 주장했다.[61] 1944년 마리아나 해전 패배 후 사이판 확보를 위해 쇼와 천황에게 직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68]

오니시는 가미카제 특별 공격대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83] 그 이전부터 일본군 내에서 특공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207] 그는 1943년부터 특공 관련 의견을 받았고,[70] 1944년에는 특공 병기 개발에 찬성했다.[73] 그는 특공을 통해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고 일본을 재건할 수 있다고 믿었다.[219][220]

8. 1. 성격과 리더십

오니시는 진주만 공격이 대성공을 거둔 후에도 자만하지 않고 "진주만에서 전함을 격침시킨 탓에 미국 국민의 의지를 결집시켜 버렸다"고 분석하는 등, 전쟁에 대해 냉정하고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연일 대본영에서 발표되는 화려한 전황 보도를 듣고 오히려 "미담이 있는 전쟁은 좋지 않다", "용감한 신문 기사가 많이 나오는 것은 전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불안감을 느꼈다.[43]

겐다 미노루 대좌는 오니시와 함께 근무하며 "옳은 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며,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하고 무절조하다고 욕을 먹더라도 개의치 말라"는 오니시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했다.[43]

이노구치 리키헤이 대좌는 오니시를 중일 전쟁에서 공격기를 직접 지휘하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다음가는 일본 항공의 거물로 평가했다. 또한 "배짱 있는 추진력 넘치는 투지로 가득 찬 장수", "항상 진두에 서서 부하들로부터 칭송받았다"고 묘사하며, 오니시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비슷한 기풍을 지녔다고 평가했다.[43]

몬지 지카노리는 오니시의 부관 시절, 오니시의 첫인상을 "눈빛은 매섭지만, 잘 해낼 수 있겠다"고 느꼈으며, 외모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근육질로 만든 듯"하다고 묘사했다. 몬지는 오니시가 말수는 적지만 부하에 대한 배려심이 넘쳤고, 공습 속에서도 척척 업무를 해내는 자신에게 "부관은 공습에 익숙하군"이라며 용기를 칭찬해 감격했다고 회상했다.[43]

8. 2. 특공에 대한 철학

오니시 다키지로는 가미카제 특별 공격대의 창시자로 여겨지지만,[83] 가미카제 특공대 이외의 "특공의 생모"로 보는 견해도 있다.[206]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일본군 내에서 특공에 대한 연구는 진행되고 있었다.[207] 1944년 4월에는 인간 어뢰 "가이텐" 개발이 시작되었고,[208] 9월에는 "해군 특공부"가 발족하여 오모리 센타로 중장이 책임자가 되었다.[209] 일본 육군 또한 이른 시기부터 항공 특공을 조직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210]

오니시는 군수국 요직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중유와 휘발유가 반 년도 버티지 못하고 모든 기능이 정지될 것이므로,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219] 그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격을 가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하고, 만주 사변 이전으로 일본을 되돌리려 했다.[219] 오니시는 특공을 통해 천황이 전쟁 중단을 결심하고, 이 희생이 일본 재건의 역사가 될 것이라 믿었다.[219][220]

오니시는 특공을 "통솔의 외도"라고 생각했지만,[137] 당시 전력으로는 일반 공격이 어렵기 때문에, 특공이 큰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보았다.[222][223] 그는 "청년의 순수, 가미카제를 일으킨다"는 글을 쓰며, 30세 이하 젊은이들의 희생정신과 실행이 일본을 구할 것이라 믿었다.[161] 그는 부관에게 "백 년 후 지기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224]

도가와 유키오 기자에게는 "이길 수 없더라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 전부가 특공 정신을 발휘하면, 비록 졌더라도 일본은 망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217][226]

1945년 8월 13일, 오니시는 "2천만 명의 일본인을 특공으로 사용하면 지지 않는다"고 간언했다.[212] 이는 "2천만 명 특공 발언"으로 유명하며, 전쟁 말기에는 "1억 총 옥쇄"를 주장하기도 했다.[213]

8. 3. 전쟁관과 국가관

오니시 다키지로는 해군 내에서 항공 주병론과 전함 무용론을 주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16년 나카지마 지쿠헤이가 해군을 그만두고 비행기 제작 회사를 설립하려 할 때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출자자를 찾아다녔다.[14] 나카지마는 오니시에게 전술 및 경제적 관점에서 대함 거포주의를 버리고 항공 군비로 전환해야 하며, 국산 항공기와 민영 생산 항공기여야 함을 강조했고, 이는 오니시의 항공 주병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14]

1930년대에 오니시는 제1항공전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과 함께 항공 주병론을 더욱 강화했다. 1935년에는 야마토형 전함 건조에 반대하며 "한쪽을 폐지하고 5만 톤 이하로 하면 항공모함을 세 척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26] 또한 후쿠도메 시게루 군령부 과장에게 "야마토 하나 건조비로 천 대의 전투기를 만들 수 있다"며 건조 중지를 요청했다.[27]

오니시는 대형기론(전투기 무용론)을 지지했다. 1935년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 연구회에서 그는 쌍발 육상 공격기의 우수성과 전투기의 항속 거리 및 해상 항법 능력 부족을 들어 전투기 무용론을 주장했다.[28] 1937년에는 "항공 군비에 관한 연구"라는 팸플릿을 통해 대형기에 의한 혁신과 전략 폭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수평 폭격의 낮은 명중률을 이유로 수평 폭격 폐지론을 주장했다.[32]

1941년 야마모토 이소로쿠진주만 공격 작전 연구를 오니시에게 의뢰했는데, 이는 오니시가 해군대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틀에 박힌 발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46] 그러나 오니시는 미일 전쟁에서 무력으로 미국을 굴복시킬 수 없으므로 조기 종전을 추구해야 하며, 진주만 공격과 같이 미국을 자극하는 작전은 피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50]

태평양 전쟁 중에도 오니시는 항공 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42년 그는 군비의 중심은 항공이며 전함은 전락했다고 주장했고,[57] 1943년에는 일본 해군의 작전 지도를 "어린아이가 풍선 덩어리를 너무 부풀려서 결국 펑크 낸 것"이라고 비판하며 전선 축소를 주장했다.[61]

1944년 마리아나 해전 패배 이후, 오니시는 사이판 확보를 위해 미 기동 부대에 대한 육해군의 "전력의 편도 공격"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7] 그는 사이판 포기가 일본의 국방을 위태롭게 한다고 주장하며 쇼와 천황에게 직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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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1-22
[23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9-01-11
[23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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